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영경묘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5대조이며 고려국의 장군을 지낸 이양무(李陽茂) 장군과 부인 이씨(李氏)의 묘이다.


목조대왕이 하늘의 계시를 받아 천하의 대길지에 아버지 묘를 쓰고 5대 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백우금관전설(百牛金棺傳說)'을 간직하고 있다. 1393년(태조2)에 삼척이 목조의 외향이고 선대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군(郡)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는 등 조선 전기부터 왕실에서 관리해온 조선왕조의 근원(根源)이다.

▶ 입구 주차장에서 약 2.0km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조선 26대 임금 고종은 대한제국을 만천하에 선포한 직후인 1899년에 나라의 정통성과 황제국의 권위 확립이라는 대명제 하에 '준경묘영경묘영건청'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수축(修築) 공사를 단행하고 '준경(濬慶)' '영경(永慶)'이란 묘호를 내려 국릉(國陵)으로 공식 추봉하였다. 수호절차와 제향은 모두 나라에서 직접 거행하라는 조칙을 내려 정례화하였다.




이때 제도화된 '준경묘영경묘청명제' 제례의식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참봉(參奉) 또는 감제(祭監)라는 관리를 두어 관리해 왔다. 해방 후 1946년부터는 삼척지역 거주 종인(宗人)들로 구성된 대동계(大洞契)가 중심이 되어 제향을 봉행했다. 1957년부터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삼척군분원이 창립되어 제향 봉행을 주관하였다. 1981년부터는 준경묘영경묘봉향회가 창립되어 현재까지 제향을 주관하고 있다. '준경묘영경묘청명제'는 실로 그 전형(典型)이 120년 동안 전승되어 온 전통문화 유산인 것이다.
저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대구지원에서 버스 1대로 삼척시 준경묘 재래행사에 간다고 하여 신청하고 갔다 왔다. 그런데 준경묘는 산중턱에 있어 약 2.0Km를 걸어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다. 처음 800m는 가파르게 올라 가야 하고, 그 다음 1.2km는 완만하게 올라가면 되었다. 준경묘에 가까이 가보니 과연 명당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산골짜기에 그렇게 넓고 좋은 평지가 있는지 의의하게 생각되었다. 청명제는 약 40분정도 걸쳐서 행하여졌다. 그리고 행사를 마친 후에는 하산한 다음 재실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대구로 내려왔다. 점심은 삼척지원에서 준비한 순두부국과 두부정식으로 식사를 하였다. 준비한 관계자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
대구지원에서는 큰 버스 1대로 갔다 왔는데, 아침은 버스에서 찰밥으로 식사를 하고, 저녁식사는 군위에 있는 매운탕 집에서 하고 나서 대구로 왔다. 준비한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저도 처음으로 참석하여 우리 조상의 뿌리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준경묘‧영경묘는 역사적 풍수지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에 국가사적(제524호)으로 지정되었다. 고종 때 양 묘 수축역사와 제향 의례절차가 기록된 「준경묘영경묘영건청의궤」는 2016년에 국가 보물(제1901-9호)로 지정되었다. 삼척시에서는 이 보물을 한글번역본으로 발간한 데 이어 양 묘 제례에 관련된 고문서 11건도 「준경묘영경묘고문서집성」이라는 한글번역본을 발간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전 국민과 함께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준경묘영경묘청명제는 조선왕실에서 제도화된 의례절차를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복으로 착용하고 있는 '흑단령' 또한 조선 시대의 복식 문화를 유일하게 전승하고 있다. 의례절차 모두가 하나같이 고문서 기록에 따르고 있어 이 지역의 고유 전통문화로 영구히 전승되어야 할 '문화유산'이다.


▣ 현황
강원도 삼척에 있는 준경묘와 영경묘는 서로 4㎞ 정도 떨어져 있다. 1899년에 묘역을 조성할 때 각각의 무덤 가까이에 정자각을 만들었으며, 재실은 준경묘와 영경묘 사이에 있는 활기동에 건립하였다.
대한제국기에 제향은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거행하였고 준경묘 헌관은 삼척군수, 영경묘의 헌관은 강릉군수가 맡았다. 현재 제향은 4월 20일에 거행한다.
▣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왕실 제사는 종묘와 왕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종묘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부터 차례대로 선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이는 유교 예법상 목조까지를 제향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전주이씨의 시조와 목조 고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이것은 왕실의 유구한 역사를 선조의 무덤과 제향을 통해 확인하려는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영경묘와 준경묘가 조선시대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한 것은 선조를 기리고 싶은 열망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증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엄정성의 결과였다.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왕실 묘역에 포함시킨 것은 역사적 사실의 결과라기보다 황실의 존양과 풍수설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당시 황실 중심의 국가 건설을 위한 신화의 창출이었다. 이후 영경묘와 준경묘는 목조가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함흥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왕실 역사의 사적(史蹟)으로 기념되었다.
참고 자료: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삼척군분원
▶ 재실 주차장

▶ 재실

참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h0UdFL_hXM